나는 흔히 말하는 미니멀 라이프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. 나 스스로도 5년 전 정도부터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해왔고, 그게 연식이 조금 쌓였는지 이제는 주변 사람이 눈에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비치기 시작한 것 같다.
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계기는 몹시 사소한 것이었다. 나는 원래부터 쇼핑 같은 것에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성격이다. 하지만 유독 필기구에 대해서 만큼은 소유욕이 대단했다. 필기구에 대한 물욕은 꽤 예전인 학창 시절부터 시작되었다. 당시에는 뭔가 좋은 펜을 쥐고 있어야 공부가 더 잘 될 것 같다거나, 또 아무 문제 없는 볼펜의 결점을 굳이 찾아내는 등 새로운 구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그럴듯한 이유를 끝없이 만들어 냈다.
늘어가는 필기구의 수는 내가 필기하며 소모하는 양을 한참 웃돌았고 점점 더 많은 필기구들이 서랍 속에 쌓여갔다. 개중에는 노트 한 페이지도 채 쓰지 못한 녀석들도 적지 않았다.
하루는 서랍을 열어 쌓여있는 필기구들을 살펴보는데 한 볼펜이 눈에 들어왔다. 예전 일본의 한 대학교에서 받은 학교 이름이 각인되어 있는 볼펜이었다. 기념품으로 소중히 아끼고 싶었던 걸까? 나는 그 볼펜을 한 번도 쓰지 않은 채 서랍 속에 고이 모셔두었고 그게 몇 년이나 지나버린 것이었다. ‘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.’ 싶었다.
매일 같이 종이 위를 바쁘게 지나다니며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 그 필기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아닐까? 실수로 떨어뜨리거나 다른 물건과 부딪혀 몸통에 흠집이 나고 점점 상처투성이가 되어 가더라도, 자신이 품고 태어난 잉크를 모두 소모하는 것이 가장 의미 있는 필기구의 마무리 일 것이다. 어떻게 생각해도 서랍 속에서 빛 한 번 보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.
“그래 일단 서랍 속에 있는 필기구를 다 쓴 다음에 새로운 걸 사자.”
그렇게 생각한 것이 시작이었다. 당시에는 단지 쌓이고 쌓인 필기구를 처리하기 위해서, 또 한 편으로는 필기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그렇게 생각했었다. 그런데 지금 되돌아보면 어쩌면 그 생각 자체가 조금은 미니멀리스트적인 사고방식이었는지도 모르겠다. 하여튼 그렇게 5년 정도를 보내고 나니 확실히 눈에 띄게 필기구의 수가 줄어들었다. 하지만 그동안 얼마나 사 모았던지 바닥을 드러내려면 앞으로도 몇 년의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. 특히나 최근에는 컴퓨터 작업이 많아져서 점점 실제로 필기하는 양이 줄어들고 있는 만큼 어쩌면 예상보다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.
그런데 그 과정에서 느낀 게 있다. 이전에는 아끼는 필기구의 잉크가 줄어드는 것을 보는 게 아깝고 속상했다. 그렇게 생각했었기에 아끼는 수많은 필기구들을 서랍 속에 처박아 둔 것이겠지. 하지만 막상 필기구의 수명이 다 할 때까지 써보니 더 큰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. 특히 글을 쓰는 도중 잉크가 완전히 소모되어 미처 완성되지 못한 마지막 한 글자를 보면 왠지 모를 뿌듯함마저 느껴졌다. 또한 내 손에 들어온 필기구들에게 충분히 의미 있는 생을 보낼 수 있게 해준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.
지금은 필기구뿐 아니라 다른 물건들에게도 같은 마음으로 대하고자 노력하고 있다. 하나하나의 물건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다 할 때까지 사용하는 것. 나는 그게 맞는 것 같다.
하지만 이렇게 생각 하면서도 끝없이 흔들리는 것 또한 사실이다.
'저걸 하나 사는 게 편하지 않을까?'
'새로 나온 게 훨씬 예쁜데?'
'지금 싼데, 혹시 모르니 하나 더 마련해 놓는 게 좋지 않을까?'
끊임없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러한 생각들이 새로운 구매를 부채질한다. 사실 그러한 것들 중 대부분은 없어도 살아가는데 큰 문제가 없다. 물론 최근 기술의 발전으로 몇몇 물건들은 전보다 훨씬 더 편리한 삶을 나에게 제공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.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, 불편한 만큼 조금만 더 부지런히 몸을 움직인다면 그 역시도 크게 문제 될 것 없을 것이다.
하지만 정말 솔직히 말하면,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매번 흔들리곤 한다. 그런 점에서 나는 진정한 미니멀리스트가 되기에는 한참 먼 것 같다. 법정 스님의 무소유 같은 삶은 그야말로 범접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다. 하지만 비록 반쪽짜리 미니멀리스트이지만 그래도 이러한 삶의 방식이 나에게는 어울리는 것 같으니 앞으로 조금 더 노력해볼까 싶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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